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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우리의 20세기>는 페미니즘 영화일까? (세대 차이, 모성, 영화의 한계)

by 수박마스터 2026. 3. 9.

OTT 서비스에서 영화를 고르다 보면 몇 시간이 훌쩍 지나가는 경험 다들 있을 거다. 나도 물론 마찬가지다. 오죽하면 사람들 사이에서 정작 넷플릭스에서 콘텐츠를 보는 시간보다 고르는 시간이 더 오래 걸린다는 밈이 생겼을까. 그렇게 또 하염없이 스크롤을 내리다 웨이브에서 영화 <우리의 20세기(20th Century Women)>(2016)를 만났다. 이 영화는 현재 한국 넷플릭스에서는 볼 수 없고 웨이브와 LG U+에서만 볼 수 있다. 원제목을 직역하면 '20세기 여성들'인데 한국 제목은 '우리'라고 표현했다. (왜일까.. 개인적으로 원제목이 훨씬 마음에 든다.) 한국에서는 미국 개봉보다 1년 늦은 2017년에 개봉했고 네이버 평점도 8.44로 높은 편이다. 사실 여성 해방 이야기를 기대했는데 막상 영화를 보고 나니 그보다는 1979년 산타바바라를 배경으로 펼쳐지는 한 가족의 세대 차이와 모성에 대한 깊이 있는 성찰을 담은 영화라는 걸 알게 됐다. 마이크 밀스(Michael Mills) 감독이 자신의 어머니를 모델로 삼아 만든 이 영화는 주연 배우 아네트 베닝(Annette Bening)의 커리어 최고 연기와 함께 보는 내내 우리들의 가족 이야기처럼 느껴질 만큼 사적이면서도 보편적인 감정을 건드렸다.

영화 우리의 20세기

1979년이라는 시대적 배경이 만든 세대 차이

영화 <우리의 20세기>는 1979년 미국 산타바바라를 배경으로, 50대 중반의 이혼한 여성 도로시아(아네트 베닝)와 그녀의 15세 아들 제이미(루카스 제이드 주만)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이 시기가 미국 역사상 특별한 전환기였다는 것이다. 지미 카터 대통령의 '불안 연설(Malaise Speech)'이 나온 해이자 포드 대통령 시대가 끝난 직후였다. 여기서 '불안 연설'이란 1979년 7월 카터 대통령이 에너지 위기와 국민의 정신적 위기를 진단하며 행한 역사적 연설을 의미한다. (출처: 미국국립기록관리청).

이 영화를 보며 가장 흥미로웠던 건 도로시아가 1930년대 대공황 시대에 태어나 자랐다는 설정이었다. 도로시아는 절약과 인내를 미덕으로 배운 세대지만 아들 제이미는 1960년대 중반에 태어나 히피 문화와 펑크 록의 여파 속에서 자라는 세대다. 영화 초반 도로시아가 제이미와 함께 밴드 The Raincoats의 <Fairytale in the Supermarket>을 듣는 장면이 나옵니다. 도로시아는 "저 사람들 자기가 형편없다는 거 알고 있는 거야?"라고 묻고, 하숙인 아비(그레타 거윅)는 "그들은 표현할 도구는 없지만 감정은 넘쳐나서 그게 다 열정으로 분출되는 거예요"라고 답한다. 이 짧은 대화가 영화 전체의 주제를 압축한다. 도로시아는 이해하려고 하지만 완전히 이해할 수 없는 거리감, 그게 바로 세대 차이의 본질이다.

나도 제 부모님 세대와 대화하다 보면 비슷한 순간을 경험한다. 같은 단어를 쓰지만 전혀 다른 뜻으로 받아들이는 일이 많다. 영화는 이런 미세한 균열을 콜라주 기법으로 표현한다. 1930년대 흑백 사진과 1960년대 히피 운동 영상, 지미 카터의 연설과 펑크 음악이 뒤섞이면서 각 캐릭터의 내면을 보여주는데, 처음엔 좀 산만하다 싶었지만 나중엔 이게 정확한 선택이었다고 느꼈다. 서로 다른 시대를 살아온 사람들이 한 공간에서 부딪히는 모습을 시각적으로 훌륭하게 담아낸 장면이니까.

모성의 진짜 의미, 그래도 시도하는 용기

도로시아는 40세에 제이미를 낳았다. 이 나이에 엄마가 된다는 건 당시로서는 상당히 늦은 편이었다. 영화 속에서 도로시아는 제이미를 키울 '도구'가 없다고 느낀다. 그래서 그녀는 두 명의 젊은 여성, 24세 사진작가 아비와 17세 제이미의 친구 줄리에게 아들을 함께 키워달라고 부탁한다. 줄리가 묻는다. "남자를 키우려면 남자가 필요한 거 아닌가요?" 도로시아는 답한다. "아니, 난 그렇게 생각 안 해." 이 대목에서 나는 솔직히 예상 밖의 감정을 느꼈다. 흔히 모성 영화라고 하면 엄마의 희생과 헌신을 강조하기 마련인데 이 영화는 오히려 엄마의 불완전함과 무력감을 솔직하게 드러낸다. 도로시아는 제이미를 사랑하지만 그를 이해하지 못하고 이해하려고 노력하지만 방법을 모른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것이다. 이게 바로 현실적인 모성의 모습 아닐까? 완벽한 엄마가 아니라도 불완전하지만 최선을 다하는 사람.

영화는 모성을 'motherhood'가 아닌 'maternal effort'로 재정의한다. 여기서 maternal effort란 완벽한 결과가 아니라 계속해서 시도하는 과정 자체를 의미합니다. 도로시아는 펑크 클럽에 혼자 가고 낯선 사람들을 저녁 식사에 초대하고 생리에 대한 솔직한 대화를 주저 없이 나눈다. 처음엔 이런 행동들이 무모해 보였지만 이건 결국 제이미와 소통하기 위한 도로시아만의 방식이었다. 특히 인상 깊었던 건 영화 중반부터 도로시아와 제이미의 대립이 점차 누그러지는 과정이었다. 두 사람 모두 서로를 이해하고 싶다는 목표가 같다는 걸 깨닫게 된다. 영화는 이 변화를 무지갯빛 트래킹 샷과 은은한 시간 경과 표현으로 담아낸다. 내 경험상 이런 가족 간의 화해는 극적인 사건보다 이렇게 조용히 찾아오는 경우가 많다.

아네트 베닝의 인상적인 연기와 영화의 한계

아네트 베닝은 영화 <우리의 20세기>에서 사실상 커리어 최고의 연기를 보여준다. 도로시아라는 캐릭터는 자칫하면 괴짜 할머니나 수동적인 희생자로 그려질 수 있지만 베닝은 주인공을 강인하고 복잡한 인물로 만들어낸다. 특히 담배 피우는 장면 하나하나에서도 캐릭터의 내면이 느껴졌다. 영화 속에서 "멋진 시가렛 걷기(cool cigarette walk)"가 어떤 건지 궁금했던 적 있냐는 대사가 나오는데 베닝의 워킹만 봐도 그게 뭔지 알 수 있을 정도다. 조연들도 훌륭하다. 그레타 거윅은 당시 이제 막 배우로 이름을 알리던 시기였는데도 아비 역을 맡아 펑크 사진작가의 에너지와 취약함을 동시에 표현했다. 엘 패닝은 17세 줄리 역으로 자신의 필모그래피 중 가장 뛰어난 연기를 보여줬고요. 빌리 크루덥이 연기한 집 수리공 윌리엄은 "질만 가지고 섹스하면 안 돼. 여자 전체와 섹스해야지"라는 명대사를 남기며 70년대 히피 문화의 잔재를 코믹하게 표현했다.

하지만 영화에도 분명 한계는 있다. 나는 제이미 역의 루카스 제이드 주만의 연기가 아쉬웠다. 다른 배우들이 워낙 훌륭해서 더 그렇게 느껴졌을 수도 있지만, 제이미라는 캐릭터가 관객에게 충분히 와닿지 않았다. 이건 배우의 문제라기보다는 캐릭터 설정 자체의 문제일 수 있다. 마이크 밀스 감독이 자전적 요소를 담다 보니 제이미가 실제 인물이라기보다는 감독의 아바타처럼 느껴지는 순간들이 있었다.

더 큰 문제는 영화가 페미니즘을 다루는 방식이다. 영화 속에서 여성 해방 운동 관련 서적들이 자주 언급되고 인용되지만 정작 세 명의 여성 캐릭터들은 대부분 제이미의 삶과 행동을 분석하는 데 시간을 쓴다. 베크델 테스트(Bechdel Test)를 통과하기 어려울 정도다. 여기서 베크델 테스트란 영화 속에서 (1) 이름이 있는 여성 캐릭터가 최소 두 명 나오고, (2) 그들이 서로 대화를 나누며, (3) 그 대화 주제가 남성이 아닌 다른 것인지를 확인하는 기준이다. (출처: 젠더 평등 미디어 연구소).

영화 <우리의 20세기>를 완벽한 영화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시간의 흐름과 세대 간 공통점, 모자간의 사랑에 대해 진지하게 질문을 던지는 작품이다. 마이크 밀스 감독은 전작 <비기너스>에서 이미 그 재능을 입증했는데, 이번 작품에서는 더 성숙하고 섬세한 시선을 보여준다. 로저 닐이 작곡한 전자음악 사운드트랙과 토킹 헤즈, 블랙 플래그, 데이비드 보위, 더 클래시 같은 밴드들의 음악 배치도 탁월했다. 넷플릭스에서 캐릭터 중심의 섬세한 드라마를 찾고 있다면 이 영화를 강력히 추천한다. 다만 10대 아들을 둔 부모라면 좀 더 마음이 복잡해질 수 있으니 각오하길 바란다.


참고: https://www.imdb.com/title/tt4385888

 

20th Century Women (2016) ⭐ 7.3 | Comedy, Drama

1h 59m | 15

www.imdb.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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